(옥천)조선도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충절의 의리를 실천한 중봉 조헌

- 일시: 2023-5-20~21
- 날씨: 흐림
- 몇명: 홀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어린이날과 어버이날도 있지만 스승의 날과 성년의 날 그리고 오늘처럼 부부의 날도 있습니다.이것 저것 다 챙기기 어렵습니다.그기에 개인적으로 결혼기념일과 고교졸업 40주년을 겸한 체육행사도 있었기 때문에 5월은 뭔가 휙 지나버리는 느낌입니다.

 

며칠전부터 여름이 되었음을 느낍니다.그래서 혹서기 대비 3가지를 준비했습니다.자동차 시트에 "14팬 쿨링 시트"를 설치하고 목에는 12시간 지속되는 4000mAh의 "넥 쿨링 선풍기"를 구입했으며 "반팔 토시"를 준비했습니다.상당히 도움이 됩니다만 넥 쿨링은 팬 돌아가는 가는 기계음이 계속 들리면 졸음이 오는 단점이 있습니다.그래서 운전할때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옥천의 주안점은 중봉 조헌의 발자취를 찾아가보는 것을 우선으로 했습니다.그래서 나중에 이지당이 되는 각신서당과 옥천 표충사를 중심에 두고 탐방계획을 세웠습니다.  


옥천은 소백산맥의 주맥인 속리산에서 뻗어내린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구불구불하고 좁은 도로가 많아서 약간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맞은편 차량과 급작스럽게 조우하여 정면충돌 사고가 날 가능성이 크므로 속도를 줄이고 길이 굽어서 전면이 보이지 않을 때 특히 주의를 요합니다. 

 

▷ 답사일정(風輪) :552km

 

부소담악-이지당(각신서당)-정지용문학관-청풍정-가산사--후율당-옥천 표충사(중봉 조헌 묘소)-상춘정

 

 

2023.5.20

▷부소담악


부소담악이 바로 보이는 주차장까지 가려면 지도 상의 주소(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759)를 입력하고 갔더니 네비게이션상의 마지막 위치는 차가 갈수 없는 섬을 가르켰지만 어찌어찌하여 무사히 주차장까지는 갔습니다.만약 다음에 간다면 "추소리 마을광장(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길 30)"으로 입력하여 도착되면 그대로 아래로 더 내려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옵니다.큰 도로에서 마을진입로 입구가 협소하여 찾기 어렵고 도로가 좁고 아래로 경사도가 커서 교행의 어려움이 있습니다.그래서 저처럼 늦은 밤에 도착하여 일박을 하고 나면 아침 일찍 그 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주차장에서 바라 본 부소담악의 추소정 모습입니다.

 

주차장에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강가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많은 차들이 내려 가 있는 모습입니다.

부소담악은 물 위로 솟은 기암절벽인데, 길이가 무려 700m에 달합니다.조선시대 학자 송시열이 소금강이라 예찬한 추소팔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경입니다.중봉 조헌의  율원구곡 제4곡은 창병(蒼屛 "푸른 병풍"의 의미)으로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부소담악입니다.

제4곡 창병(蒼屛, 부소담악)

 

사곡창병대석암(四曲蒼屛大石巖) 사곡이라 창병(蒼屛) 큰 바위로 둘러쌌는데,

암전풍엽영<毛監>참(巖前楓葉影<毛監>毶) 바위 앞에 단풍잎 그림자 짙어라.

산용준수무인견(山容峻秀無人見) 산은 높고 빼어나지만 보는 사람은 없는데,

알옥명천형벽담(戞玉鳴泉馨碧潭) 옥소리 나는 샘물(강물) 푸른 연못을 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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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原九曲 序詩  /  중봉 조헌

 

천성노악비정령(天成老嶽비精靈) 하늘이 만든 노성산(老城山)에 정령이 숨어 있으며

악하천류보보청(嶽下泉流步步淸) 산 아래 샘물 흘러 한결같이 맑아라

행도율원기승처(行到栗原奇勝處) 율원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에 도달하니

무이수속도가성(武夷須續棹歌聲) 모름지기 무이구곡의 노 젖는 노랫소리 이어지네

 

제1곡 창강(滄江, 금천계곡)

 

일곡창강유소선(一曲滄江有小船) 일곡이라 창강(滄江)에 작은 배 떠있는데,

발원남악작장천(發源南嶽作長川) 남쪽 산에서 발원하여 긴 강을 이루었네.

서귀금록인귀해(西歸錦麓因歸海) 서쪽으로 금록(錦麓)을 돌아 바다로 흘러들어가,

벽랑응통수사연(碧浪應通洙泗烟) 푸른 물결 응당 수사(洙泗))의 안개와 통하네.

 

제2곡 장현봉(獎峴峰, 장령산)

 

이곡초요장현봉(二曲岧嶢獎峴峰) 이곡이라 높디높은 장현봉(獎峴峰),

천암만학담추용(千巖萬壑淡秋容) 수 많은 바위와 골짜기 가을 모습 맑아라.

서대망료인첨북(西臺望了因瞻北) 서대산(西臺山)을 바라보다 북쪽을 쳐다보니,

면상봉래취만중(緬想蓬萊翠萬重) 만 겹의 봉래산(蓬萊山) 푸른 봉우리생각나네.

 

제3곡 임정(林亭, 이지당 근처)

 

삼곡임정소사선(三曲林亭小似船) 삼곡이라 숲속의 정자 배와 같이 작은데,

일린모옥자하년(一隣茅屋自何年) 이웃에 띠풀집(초가집) 언제부터 있었나?

인휴조율정신양(人攜棗栗呈新釀) 사람들이 대추와 밤, 새로 담근 술 가져다주니,

노수풍류이역련(老守風流爾亦憐) 늙은 태수의 풍류 그 또한 아름다워라.

 

제4곡 창병(蒼屛, 부소담악)

 

사곡창병대석암(四曲蒼屛大石巖) 사곡이라 창병(蒼屛) 큰 바위로 둘러쌌는데,

암전풍엽영<毛監>참(巖前楓葉影<毛監>毶) 바위 앞에 단풍잎 그림자 짙어라.

산용준수무인견(山容峻秀無人見) 산은 높고 빼어나지만 보는 사람은 없는데,

알옥명천형벽담(戞玉鳴泉馨碧潭) 옥소리 나는 샘물(강물) 푸른 연못을 울리네

 

제5곡 동남곡(東南谷, 동남곡)

 

오곡동남곡구심(五曲東南谷口深) 오곡이라 동남쪽의 골짜기 입구 깊은데,

의희선려격운림(依俙仙侶隔雲林) 신선의 세계와 닮아 운림(雲林)속에 떨어져있네.

임변유객형용구(林邊有客形容癯) 숲가에 나그네 몸과 얼굴은 가냘퍼도,

산수고가천고심(山水高歌千古心) 산수(山水)속에서 천고심(千古心)을 큰 소리로 노래하네

 

제6곡 문암(門巖, 서화천)

 

육곡송삼호벽만(六曲松杉護碧灣) 육곡이라 소나무 삼나무 푸른 물굽이 감쌌는데,

소소일경석위관(蕭疏一逕石爲關) 쓸쓸하고 한적한 오솔길 돌이 관문(關門)을 이루었네.

창애취벽고천척(蒼崖翠壁高千尺) 푸른 벼랑 비취빛 절벽 높이가 천 자인데,

부앙이유객의한(俯仰夷猶客意閒)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니 오히려 나그네 마음 한가하네.

 

제7곡 은병(隱屛, 이탄여울 근처)

 

칠곡건상도벽탄(七曲褰裳渡碧灘) 칠곡이라 바지 걷고 푸른 여울 건너며,

은병유곡비회간(隱屛幽谷費回看) 은병(隱屛) 깊은 골짜기 뒤돌아보곤 하네.

인어추우림음심(人語秋雨霖霪甚) 사람들 가을비가 장마비처럼 거세다 말하지만,

아애비천첨득한(我愛飛泉添得寒) 나는 날리는 샘물이 더 차거워져서 좋아라.

 

제8곡 환산성(環山城)

 

팔곡궁림안활개(八曲穹林眼豁開) 팔곡이라 높은 숲 눈앞이 탁 트였는데,

강만요곽수동회(岡巒寥廓水東廻) 높은 산의 고요한 성곽 물은 동쪽으로 감도네.

추원희문경운수(秋原喜問耕雲叟) 가을 언덕에서 구름을 갈고있는 노인에 기쁘게 물으니,

위도이삼가객래(爲道二三佳客來) 두 셋 멋진 손님이 와계신다 말하네.

 

 

제9곡 삼봉(三峯, 추소리 하류)

 

구곡삼봉대숙연(九曲三峯對肅然), 구곡이라 삼봉(三峯)을 숙연하게 대하는데,

원산서무격남천(遠山西騖隔南川). 먼 산이 서쪽으로 내달려 남쪽 시내와는 막혔네.

암송계류장신항(巖松溪柳裝新巷), 바위의 소나무 시냇가 버들 새 동네를 단장하니,

과시진환별개천(果是塵寰別箇天). 과연 여기가 속세의 별천지(別天地)로다.

 

2023.5.21

 

▷이지당

입구에 주차할 공간을 마련하고자 정비사업이 한창입니다.지도로 미리 위치를 파악해보니 주차하여 일박할 곳이 마땅찮아서 근처의 부소담악에서 일박을 한 이유입니다. 정비사업을 하는 이유는 이곳 이지당이 서당 건물로는 한국 최초로 보물(제2107호)로 승격되었기 때문입니다.2020.12.28 승격되었는데 3년이 지나 이제 예산을 마련하여 집행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이지당 앞의 하천은 서화천(西華川)으로 지도상의 소옥천(小沃川)입니다.이물은 흘러 부소담악이 있는 대청호로 흘러갑니다.

"이지당 중봉선생유상지소"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崇禎 丁卯 月日(숭정 정묘 월일, 1627년. 인조5년 정묘월 정묘일)
二止堂 重峯先生遊賞之所(이지당 중봉선생유상지소)​
尤齊先生書(우재선생서)

여기서 "우재"는 우암의 또 다른 호입니다.즉 송시열이 각자한 것입니다.
유상遊賞은 놀면서 구경함을 의미하니 유상지소는 놀면서 구경하던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지당은 재미있는 건물구조입니다.건물의 정면은 서화천이 흐르기 때문에 좌측 측면으로 들어가는 구조인데 흡사 입구를 보니 정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정면 여섯 칸, 측면 한 칸에 양쪽에 누각을 덧붙인 독특한 형태로 임진왜란 때 청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의병장 중봉 조헌 선생이 후학을 기르던 곳입니다.

원래는 각신서당이었는데 이곳을 찾은 송시열 선생은 당호를 『二止堂』이라고 짓고 직접 현판까지 썼습니다.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을 지닌 시전의 문구에서 따왔습니다. (高山仰止 景行行止)

중봉 조헌이 이지당에서 지은 시가 걸려있습니다.

"水麗山明地 風高葉落秋
徜徉提督趙 邂逅廣文周
幸値仙翁集 因携童子遊
悠然成一醉 乘月步長洲”


물빛 곱고 산 밝은 땅, 바람 높고 잎 떨어지는 가을
배회하는 조제독, 주광문을 해후했네
다행히 신선들 모인 때에, 어린 사람 데리고 같이 노닐며
한가로이 모두 다 한껏 취하고서,달빛타고 긴 모래톱 걷는다네

 

글씨가 유학자답게 단정하면서도 한번씩 과격하게(?) 옆으로 길게 삐치거나 아래로 길게 내립니다. 덕분에 안정감과 효과가 확실하군요.

(필사)

 

훗날 송시열이 위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습니다.

<공경하며 중봉 선생의 이지당(二止堂) 운을 따라 김 사군(金使君) 정평(正平) 만균(萬均) 에게 보내다>

新構臨淸泚 山頹問幾秋
天衢箕尾遠 人世歲星周
事業朱書裏 淵源德水遊
欲陳明酌薦 蘋藻採芳洲

새로 지은 집 맑은 물가에 임했으니,임 가신 지 묻노라 몇 해던가
하늘 거리에 기성 미성이 멀고,인간 세상에는 세월이 흘렀구려
사업은 주자의 글 속에 있고,연원은 율곡에게 받았어라
맑은 술잔 올리고자,마름을 물가에 캐었노라

중봉 조헌의 시 뒷글자 운과 우암 송시열의 시 끝 글자인
秋,周,遊,洲 네글자가 동일한 것이 한시의 멋입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선현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필사)

 

 

서당에서 나오니 일주일 전 고교졸업 40주년 체육행사 뒤

저도 한번 심정을 묘사한 글이 있습니다.

나이 육십에 고교졸업 사십주년이라
청소년은 가고 노년초입의 얼굴들뿐
세상사 끝없는 이야기는 연이어지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술잔도 높아진다
돌아와 홀로 앉아 노래 몇곡 듣고 선
조용해지니 지나간 한바탕 꿈일런가

 

 

 

 

▷정지용문학관

 

정지용문학관은 오전 9시에 문을 여는데 너무 일찍와서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싯귀가 떠오르는 향수를 들여다보면 분명 언어표현인데 한폭의 풍경화처럼 한가로운 고향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정지용은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 시적대상의 정확하고 절제된 표현을 가다듬어 현대화시킨 장본인입니다.

정지용은 윤동주,오상순과 일본 도시샤대학 출신으로 "향수" 시는 일본 도시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했습니다. 

 

▷청풍정

청풍정은 맑은 물과 바람이 머무는 듯 한폭의 그림같은 경치를 지녔던 군북팔경 중 제5경에 속했습니다.조선 말엽 김옥균과 낙향하여 기생 명월과 함께 소일하며 지냈는데,기생 명월이 국가를 개혁할 인물인 김옥균이 외진 곳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장부의 큰 뜻을 펼치길 바라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현재의 건물은 1993년 복원한 것입니다. 

김옥균은 일찍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몽운동에 영향받아 서구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갑신정변을 주동했으나 실패하고 국외로 도피했으나 홍종우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김옥균은 요즘 시쳇말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구워삶킨 것 같습니다.

김옥균의 묘비명입니다.


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지원 약속을 했지만 어기고 일본으로 도망가고 김옥균의 형제들과 가족들은 모두 떼죽음을 당합니다. 안동 김씨 문중은 균 자 항렬을 전부 규 자로 바꿔야 했습니다.

일본을 과하게 신뢰한 것이 실패의 요인입니다.

박영효는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적이다. 외교술뿐만 아니라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이 없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외세의 힘은 한국의 국익에 맞게 이용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과하면 망한 역사가 한두번 아닙니다.

아래로 내려가니 제법 낭떠러지 느낌이 납니다.

명월암이라는 각자가 보입니다.

도로가 협소한 곳이 많아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녀야하는 곳이 옥천입니다.저도 청풍정을 탐방하고 나오면서 하마트면 큰일 날뻔 했습니다.워낙 길이 꼬불꼬불하고 길이 좁아서 맞은편의 택시와 정면충돌할뻔 했습니다.

 

▷가산사


여기도 들어가는 입구가 좁고 주차 할 공간도 별로 없습니다만 최근 아스팔트로 도로를 새로 정비하여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임진년 왜적이 침입하자 기허당 영규스님이 800여명의 승병을 모아서 가산사에서 승병훈련을 한 곳이고 당시 조헌은 1600여명의 의병을 모아서 이들과 동참하게 됩니다.

 

억불숭유의 세상이지만 왜적의 침입 앞에 스님과 유학자가 동지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그로부터 18일 후인 금산전투에서 전원이 순국하게 됩니다.6백 승병들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서 현재대로 칠백의총이 된 것입니다.

영정각엔 영규대사와 조헌선생의 영정을 모셨는데 일제 강점기에 영정은 없어지고 현재 위패만 모셔져 있습니다.뒤의 작은 건물은 산신각입니다. 

현재 가산사의 위쪽 골짜기로 "대한불교조계종호국승병훈련원"이라는 신축건물이 있습니다.

 

▷후율당

 

후율당은 조헌 선생이 1588년 선조 21년에 지은 서실입니다. 조헌(趙憲)이 이이(李珥)의 후학임을 자처하여 자호(自號)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후율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죽은 뒤 사당이 되었습니다. 

▷옥천 표충사,영모재,중봉 조헌 묘소

 

표충사에는 조헌 선생의 위패와 조헌 선생의 아들로 금산에서 함께 전사한 조완기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표충사 앞에 조헌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沙工)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난고.

   석양(夕陽)에 무심한 갈며기난 오락가락 하노매

 

*지당(池塘)-못,연못
*양류(楊柳)-버드나무
*내-뿌옇게 낀 안개

*끼인 제-끼었는데
* 갈며기-갈매기
*하노매-하는구나

과격한 면은 있었으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여, 지속적으로 왜란에 대비하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함께 가져가거나 머리를 여러 번 땅에 치는 등 상소를 강경하게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도끼를 들고 가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지부상소'(持斧上疏)', 이른바 '도끼 상소'라 알려진 것이며 상소를 가납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가져간 도끼로 자기를 찍어 죽이라는 것. 상소를 올릴 당시에는 허세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후에 조헌이 하는 일을 본다면 아마 진담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義)로운 일에 굽힐 줄 모르고 바른말을 일삼는 중봉의 관직은 항상 낮은 곳에 머물렀고 권력자들에게는 지탄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낙향한 후에도 지방관을 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쟁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지만 다들 비웃었고 오로지 연안성을 지키던 신각장군만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성을 정비했고 이는 나중에 이정암이 연안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밑거름이 됩니다.

 

신각은 약탈하던 일본군 수십 명을 임진강 어귀에서 섬멸하여 조선 육군의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장계를 올리는 중대한 실수를 하여 적전도주 죄목으로 목이 잘리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신각장군은 훌륭한 전공을 세우고도 죽게되는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합니다.뒤따라 신각장군의 부인도 자결합니다.

 

토정의 권유로 율곡과 성혼을 찾아뵌 중봉은 평생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세 분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인 세 분의 스승에게서 공부한 중봉의 학문은 깊은 경지를 이룹니다.의병장 이전에 성리학자 이지만 스승 중에 토정 이지함의 영향으로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예지력도 갖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중봉 선생의 남다른 선견지명(先見之明)은 평소 갈고닦은 깊은 학문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봅니다.일찍이 정여립(鄭汝立)의 역모를 예견하였고, 왜적의 침범을 미리 간파하고 조정을 일깨우려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립니다.일본과의 통호를 경계하고 대비하라는 청절왜사소(請節倭使疏)와 사신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이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입니다.시폐를 논하는 상소가 화근이 되어 함경도에 유배간 중봉은 유배지에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영호남비왜지책(嶺湖南備倭之策) 올렸으나 조정은 이를 외면했습니다. 왜란이 일어나고 적의 침략이 중봉의 예견대로 전개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조가 이를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묘소에 침배하고 2개의 비석이 보이는데 하나는 이곳으로 이장할때 송시열이 조헌의 공적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중봉조헌신도비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둔 것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조헌(1544∼1592)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습니다.이 비는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로,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습니다.

▷상춘정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일출 사진찍기 명소 상춘정입니다.날씨가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일출사진은 포기하고 마지막 식사장소로 이곳을 택했습니다.사진을 찍을때는 방향을 달리하여 하늘빛이 반영되는 물을 넣고 찍으면 됩니다.야간에 별빛을 담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중봉 조헌의 예지력과 대응은 훌륭했습니다.예전이나 지금이나 외세에 너무 기대지 말 것과 특히 일본은 조심해야합니다.일본은 중국의 30만명을 죽인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고 한국의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를 부정합니다.그런데도 오히려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최근 신문내용인 

윤, 일본에 또 저자세…“100년 전 일로 ‘무릎 꿇으라’ 동의 못 해”

라는 대응으로 보이는 플랭카드가 옥천에서 보입니다. 

"윤"의 말에  "우리국민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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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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